기록과 기억의 켜를 한 겹씩 들춰본다.

작성일 2026. 9.
서울 지하철 2호선 강남역 10번 출구, 2016년 5월의 어느 날 그 좁은 통로 벽면은 노란색과 분홍색 포스트잇으로 뒤덮여 있었다. 손글씨로 눌러쓴 문장들이 벽 전체를 채웠다. "당신의 잘못이 아니에요", "우연히 살아남았습니다", "조의를 표합니다". 지나가던 시민들이 걸음을 멈추고 그 앞에 국화를 놓았고, 몇몇은 말없이 눈물을 훔쳤다. 이 자발적인 추모 행렬은 며칠이 지나도 끝나지 않았다. 그런데 이 추모의 대상이 된 사건을 두고, 정작 한국 사회는 정반대의 두 목소리로 갈라지고 있었다. 누군가는 이것이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살해당한 '여성혐오 범죄'라고 했고, 다른 누군가는 그저 정신질환자가 저지른 '묻지마 범죄'일 뿐이라며 반박했다. 같은 사건, 같은 죽음을 놓고 왜 이토록 다른 이야기가 나온 것일까. 사건은 2016년 5월 17일 새벽, 서울 강남역 인근의 한 상가 건물 지하에서 일어났다. 이 건물에는 노래방과 술집들이 있었고, 남녀 공용으로 쓰이던 화장실이 하나 있었다. 그날 새벽, 30대 남성 한 명이 이 화장실에 들어가 흉기를 품고 오랜 시간 서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화장실을 드나드는 사람들을 지켜보다가, 남성이 들어오면 그대로 보내고 여성이 들어오기를 기다렸다고 전해진다. 그렇게 몇 차례 기회를 흘려보낸 끝에, 새벽 1시가 조금 넘은 시각 한 여성이 화장실에 들어섰다. 그는 당시 23세로, 근처 술집에서 지인들과 함께 있다가 잠시 자리를 비운 것으로 전해진다. 남성은 그를 향해 흉기를 휘둘렀다. 여성은 그 자리에서 숨졌다. 사건 직후 경찰에 붙잡힌 남성은 도주하지 않고 현장 인근에 머물러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초기 수사 단계에서 그는 오랫동안 정신과 치료를 받아온 이력이 있으며, 조현병 진단을 받은 적이 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경찰은 이 부분에 주목해 사건을 '정신질환자에 의한 묻지마 범죄'로 규정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실제로 초기 언론 보도 다수도 이 사건을 '강남역 묻지마 살인'이라는 이름으로 다뤘다. 그런데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그가 경찰 조사 과정에서 진술한 범행 동기가 알려지면서, 사건은 전혀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그는 평소 여성들이 자신을 무시하고 자신을 우습게 봐왔다는 취지의 말을 반복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가 왜 하필 화장실에서 오랜 시간을 기다렸는지, 왜 남성이 아닌 여성이 들어오기만을 골라 기다렸는지에 대한 정황이 알려지자 온라인 커뮤니티와 SNS에서는 즉각적인 반응이 터져 나왔다. 이 죽음이 단순히 '운이 나빴던 사고'가 아니라,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표적이 됐을 가능성이 제기된 것이다. 특히 그가 남성들을 그냥 보내고 여성만을 기다렸다는 정황은, 많은 여성들에게 낯선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날 화장실에 들어간 사람이 자신이었을 수도 있었다는 감각, 좁은 골목이나 늦은 밤 화장실에서 느껴온 막연한 불안이 처음으로 하나의 사건과 결합되는 순간이었다. 강남역 10번 출구의 포스트잇 추모는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됐다. 처음에는 소수의 추모객이 놓은 몇 장의 종이였지만, 삽시간에 그 수가 불어났다. 추모의 언어는 애도에서 그치지 않았다. "나는 우연히 살아남았다"는 문장이 곳곳에서 반복됐다. 이는 이 사건을 특정 개인의 불행이 아니라, 여성이라면 누구나 마주할 수 있었던 위험으로 받아들이겠다는 선언이었다. SNS에서는 이 사건을 계기로 자신이 겪었던 크고 작은 여성혐오 경험을 고백하는 글들이 이어졌다. 그동안 개인적인 불쾌함이나 불안으로만 여겨졌던 경험들이 하나의 사회적 언어를 얻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이 흐름에 반발하는 목소리도 빠르게 커졌다. 일부 남성 이용자들과 몇몇 언론은 이 사건을 '여성혐오 범죄'로 규정하는 것 자체에 강하게 반발했다. 피의자가 조현병 진단을 받은 이력이 있다는 점을 근거로, 이는 정신질환의 문제이지 성별의 문제가 아니라는 주장이었다. 이들은 강남역 추모 현장에 몰려가 '남성 혐오 반대'를 외치는 팻말을 들기도 했고, 온라인에서는 두 입장 간의 논쟁이 격렬한 언쟁으로 번졌다. 경찰과 검찰 역시 이 사건을 '정신질환에 의한 범행'으로 규정하는 데 무게를 실었다. 이는 수사기관이 사건의 성격을 어떻게 규정하느냐가 이후 재판 결과는 물론, 사회적 해석의 방향까지 좌우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큰 지점이었다. 그런데 이 대립은 단순히 '조현병이냐 여성혐오냐'라는 이분법으로 정리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여성단체와 상당수 전문가들은 정신질환과 여성혐오가 서로 배타적인 개념이 아니라고 지적했다. 그가 조현병을 앓고 있었다 해도, 그 병증이 왜 하필 '여성'이라는 특정 대상을 향해 발현됐는가는 별개의 질문이라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정신질환이 범행의 원인 중 하나였을 수는 있지만, 그것이 범행 대상을 여성으로 한정한 이유까지 설명해주지는 않는다는 논리였다. 이 지점은 이후 몇 년간 한국 사회에서 반복적으로 소환되는 논쟁의 핵심 구도가 됐다. 사건의 진짜 성격을 둘러싼 이 물음은, 수사와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쉽게 봉합되지 않았다. 재판은 세간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진행됐다. 피고인 측은 심신미약 상태에서 벌어진 범행이라는 점을 주장했고, 검찰은 죄에 상응하는 무거운 처벌을 요구했다. 법원은 그가 조현병을 앓고 있었다는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범행 당시 사물을 변별하고 행동을 통제할 능력이 완전히 상실된 상태는 아니었다고 판단한 것으로 전해진다. 결국 법원은 심신미약 감경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는 무거운 형을 선고받았다. 다만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이 사건을 '여성혐오에 의한 범죄'라고 명시적으로 규정하지는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법부는 개인의 정신 상태와 책임 능력을 중심으로 사건을 판단했을 뿐, 사회적 해석의 몫까지 떠안지는 않은 셈이었다. 바로 이 지점, 즉 법이 답하지 않은 질문이 사회에 남겨졌다는 사실이야말로 이 사건이 이후에도 오래 회자된 이유였다. 판결이 내려진 뒤에도 논쟁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오히려 이 사건은 한국 사회에서 '여성혐오'라는 단어가 대중적으로 통용되기 시작한 분기점으로 기록됐다. 이전까지 소수의 여성학 연구자나 온라인 커뮤니티 안에서만 논의되던 개념이, 이 사건을 계기로 신문 사설과 방송 토론, 국회 발언대까지 올라갔다. 동시에 이 사건은 이후 한국 사회를 뜨겁게 달군 여러 논쟁의 원형이 됐다. 여성 대상 범죄가 벌어질 때마다 '이것이 여성혐오냐 아니냐'를 둘러싼 논쟁이 반복됐고, 그 논쟁의 문법 자체가 강남역 사건에서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부 논자들은 이 사건이 이듬해부터 확산된 미투 운동의 밑거름이 됐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피해와 두려움을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로 말하기 시작한 언어가, 이 사건을 통해 먼저 자리를 잡았다는 것이다. 한편 이 사건은 사회 안전과 관련한 실질적인 변화로도 이어졌다. 남녀 공용 화장실의 위험성이 새삼 부각되면서 일부 지방자치단체와 건물주들이 공용화장실을 남녀 분리형으로 개선하는 계기가 됐고, 여성 안전을 다룬 정책 논의가 활발해졌다. 또한 정신질환자에 대한 사회적 관리 체계의 허점 역시 도마 위에 올랐다. 피의자가 과거 여러 차례 병원 치료와 강제 입원을 거쳤음에도 지역사회에서 별다른 관리 없이 방치됐다는 지적이 나왔고, 이는 정신질환자 치료·관리 체계를 재정비해야 한다는 목소리로 이어졌다. 결국 이 사건은 여성혐오 논쟁만이 아니라, 정신건강 정책의 공백을 드러낸 사건이기도 했다. 시간이 흐른 지금 다시 이 사건을 들여다보면, 애초에 던져진 핵심 질문, 즉 '그는 정말 여성이 미워서 죽였는가'라는 물음에 완전한 답은 끝내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마주하게 된다. 법원은 책임 능력을 물었을 뿐 동기의 사회적 성격을 규정하지 않았고, 수사기관과 시민사회는 서로 다른 언어로 같은 사건을 설명했다. 어쩌면 이 사건이 오래도록 회자되는 이유는 그 답이 명쾌하게 나오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한 사람의 죽음을 둘러싸고 한 사회가 자신이 가진 두려움과 편견, 그리고 미처 말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꺼내놓기 시작했다는 것, 그것이 이 사건이 남긴 진짜 무게일 것이다. 강남역 10번 출구의 포스트잇은 이제 대부분 떼어졌지만, 그날 그 벽 앞에 서서 눈물을 훔치던 사람들의 질문은 아직 완전히 끝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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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6. 9.
2016년 9월 12일 저녁 7시 44분, 경상북도 경주시 일대의 아파트 단지에서는 저녁 식사를 마친 사람들이 텔레비전 앞에 모여 있었다. 갑자기 그릇이 달그락거리고 천장의 조명이 흔들렸다. 몇몇은 순간적으로 어지럼증인 줄 알았고, 몇몇은 위층에서 뭔가를 떨어뜨렸나보다 하고 넘겼다. 흔들림은 몇 초 만에 멎었다. 사람들은 다시 밥그릇을 들었고, 텔레비전 소리는 계속 흘러나왔다. 그런데 정확히 48분 뒤, 그보다 훨씬 강한 두 번째 흔들림이 찾아왔다. 이번에는 아무도 자리에 앉아 있지 않았다. 다들 신발도 제대로 신지 못한 채 현관문을 박차고 뛰쳐나갔다. 그날 밤, 경주 사람들은 자신들이 한반도 관측 역사상 가장 강력한 지진의 한복판에 서 있다는 사실을 아직 알지 못했다. 첫 흔들림은 전조였다. 기상청은 이를 규모 5.1의 전진(前震)으로 기록했다. 진앙은 경주시 남남서쪽, 내남면 부근의 지하 약 15킬로미터 지점이었다. 사람들이 안도의 한숨을 돌리던 그 48분 사이, 지하에서는 단층이 다시 크게 미끄러지고 있었다. 밤 8시 32분, 규모 5.8의 본진이 발생했다. 이는 1978년 기상청이 근대적 지진 계기 관측을 시작한 이래 한반도에서 관측된 가장 강한 지진으로 기록됐다. 진동은 경주는 물론 부산, 대구, 울산을 지나 멀리 서울에서도 체감될 정도로 퍼져나갔다. 전국 각지에서 “건물이 흔들렸다”, “엘리베이터가 멈췄다”는 신고가 동시다발적으로 쏟아졌다. 지진 직후 가장 먼저 눈에 띈 피해는 경주 시내 낡은 건물들에서 나타났다. 오래된 주택의 기와가 우수수 떨어져 골목에 흩어졌고, 상가 건물 외벽에 금이 갔다. 신라 천년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경주에서는 문화재 피해도 우려됐다. 첨성대는 기울기가 미세하게 더 커진 것으로 조사됐고, 첨성대를 비롯한 일부 석조 문화재에서 균열과 낙석이 확인됐다는 보도가 이어졌다. 다행히 인명 피해로 이어질 만한 대형 붕괴는 보고되지 않았지만, 20명 안팎의 부상자가 발생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부분 놀라서 넘어지거나 대피 과정에서 다친 경우였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그날 밤 진짜 공포는 무너진 건물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었다. “한국은 지진 안전지대”라는 오래된 믿음이 그 순간 깨졌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태어나 처음으로 지진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아파트 주민들은 잠옷 바람으로 놀이터에 모여 앉아 밤을 지새웠고, 부산과 대구의 대형마트와 백화점에서는 고객들이 매장 밖으로 대피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통신사 서버는 안부를 확인하려는 전화와 문자로 마비되다시피 했다. 그런데 정작 사람들을 더 불안하게 만든 것은 따로 있었다. 정부의 긴급재난문자였다. 본진이 발생한 지 한참이 지나서야 재난문자가 도착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여론이 들끓기 시작했다. 실제 체감 진동으로부터 알림 문자가 오기까지 걸린 시간은 9분 안팎이었던 것으로 전해지는데, 지진이라는 재난의 특성상 그 몇 분이 뼈아픈 공백으로 느껴졌다. SNS에는 “지진이 다 끝나고 문자가 왔다”는 불만이 쏟아졌다. 이 지연은 이후 재난 문자 발송 체계를 근본적으로 재검토하게 만드는 계기가 됐지만, 그 밤에는 그저 무방비 상태의 국민들이 스스로 상황을 파악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불안은 곧 다른 곳으로 옮겨붙었다. 진앙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월성 원자력발전소가 자리하고 있었다. 지진 직후 한국수력원자력은 예방 차원에서 월성 원전의 일부 원자로 가동을 수동으로 정지시켰다. 방사능 유출 등 심각한 이상은 없었다고 발표됐지만, 국내 최대 원전 밀집 지역 중 한 곳이 규모 5.8 지진의 진앙과 지척에 있었다는 사실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공포를 안겼다. 그동안 원전 안전성 논의에서 지진은 늘 “확률이 낮은 변수”로 취급돼 왔다. 그 전제가 그날 밤 통째로 흔들린 셈이었다. 지질학자들 사이에서도 술렁임이 일었다. 경주 지진을 일으킨 단층은 양산단층대에 속한 것으로 추정됐는데, 이 단층대는 오래전부터 존재가 알려져 있었지만 실제 지진 활동성에 대해서는 학계에서도 의견이 엇갈려 왔다. “한반도는 지각판 경계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큰 지진이 드물다”는 통념이 있었지만, 이번 지진은 그 통념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사례였다. 더구나 본진 이후에도 지진은 멈추지 않았다. 크고 작은 여진이 하루에도 몇 차례씩 이어졌고, 그해 안에만 수백 차례의 여진이 관측된 것으로 알려졌다. 경주 시민들은 몇 주 동안 밤마다 다시 흔들릴지 모른다는 불안 속에 잠을 설쳐야 했다. 그런데 이 모든 소동이 가라앉을 무렵, 정말로 사람들이 두려워해야 했던 질문은 따로 있었다. “이 지진이 정말 수백 년, 수천 년에 한 번 있을 우연이었을까, 아니면 앞으로도 반복될 수 있다는 경고였을까.” 당시에는 이 질문에 자신 있게 답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정부와 학계는 “당분간 이 정도 규모의 지진이 다시 발생할 가능성은 낮다”는 취지의 설명을 내놓았고, 시간이 지나면서 여론의 관심도 점차 다른 이슈로 옮겨갔다. 경주는 서서히 일상을 되찾았고, 무너진 기와와 갈라진 담장은 하나둘 보수됐다. 하지만 그 답은 오래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정확히 1년여 뒤인 2017년 11월, 이번에는 포항에서 규모 5.4의 지진이 발생했다. 경주 지진보다 규모는 작았지만 진원의 깊이가 훨씬 얕았던 탓에 지표면에 전해진 충격은 더 컸고, 건물 붕괴와 대규모 이재민이 발생하는 실질적 피해로 이어졌다. 두 지진은 서로 다른 단층에서 발생했지만, 결과적으로 하나의 메시지를 남겼다. 한반도는 더 이상 지진의 안전지대가 아니라는 것, 그리고 경주 지진은 예외적인 해프닝이 아니라 이 땅 밑에서 실제로 에너지가 쌓이고 풀리고 있다는 증거였다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경주 지진이 남긴 것은 무너진 담장이나 깨진 기와가 아니었다. 그것은 오랫동안 당연하게 여겨온 안전 감각에 생긴 균열이었다. 이 지진 이후 정부는 건축물 내진 설계 기준을 강화했고, 기존 건물에 대한 내진 보강 논의가 본격화됐다. 재난문자 발송 체계도 손질됐다. 지진 보험이나 대피 요령에 무관심하던 사람들이 처음으로 집 안의 어느 위치가 그나마 안전한지 따져보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원전과 활성단층의 거리를 둘러싼 논의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공론화됐다. 첨성대는 신라시대 이래 크고 작은 지진을 여러 차례 견뎌내며 천 년 넘게 그 자리에 서 있었다. 2016년 9월의 그 밤에도 첨성대는 무너지지 않았다. 다만 아주 조금, 예전보다 더 기울었을 뿐이다. 어쩌면 그 미세한 기울기야말로 이 사건이 남긴 가장 정직한 증거일지도 모른다. 땅은 천 년이 지나도 완전히 멈춰 있지 않으며, 우리가 안전하다고 믿어온 땅 밑에서도 여전히 무언가는 조용히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작성일 2026. 9.
2015년 5월, 경기도의 한 병원 응급실 앞에는 열과 기침을 호소하는 68세 남성이 앉아 있었다. 그는 얼마 전 바레인과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를 오간 사업가였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아챈 의료진은 없었다. 그는 이 병원 저 병원을 옮겨 다니며 진료를 받았고, 그때마다 의사들은 감기나 폐렴 정도로 짐작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고열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왜 이 흔한 감기 같은 증상이, 훗날 한국 사회 전체를 뒤흔드는 사태의 시작점이 되었을까. 그가 겪던 병의 정체는 중동호흡기증후군, 이른바 메르스(MERS)였다. 낙타에서 사람으로 전파되는 것으로 알려진 이 바이러스는 그때까지 중동 지역 바깥에서는 큰 유행을 일으킨 적이 없었다. 한국에서 첫 확진 판정이 나온 것은 그가 증상을 보이기 시작한 지 열흘 넘게 지난 5월 20일이었다. 그 사이 그는 지역의 의원과 병원 여러 곳을 거쳤고, 응급실과 입원실에서 수많은 환자·보호자·의료진과 접촉했다. 첫 확진 소식이 알려졌을 때 방역 당국은 접촉자 수를 파악하는 것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그가 다녀간 병원이 어디였는지조차 초기에는 공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보건 당국은 “불필요한 사회적 혼란을 막기 위해서”라는 이유로 환자가 경유한 의료기관 명단을 곧바로 밝히지 않았다. 그러나 이 판단은 곧 역풍을 맞았다. 병원 이름을 모르는 시민들은 자신이 그 병원에 다녀왔는지조차 확인할 수 없었고, 어느 병원이 위험한지 알 수 없으니 오히려 모든 병원을 의심하는 분위기가 퍼졌다. 이 불투명함이 이후 사태를 키운 첫 번째 균열이었다는 지적은 사태가 진정된 뒤에도 오래 남았다. 확산은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그리고 예상 밖의 경로로 번져나갔다. 첫 환자가 입원했던 병원에서 같은 병실을 쓰던 환자들, 문병을 온 가족들이 잇따라 감염됐다. 그중에는 서울의 한 대형 종합병원 응급실을 거쳐 간 환자도 있었다. 훗날 ‘슈퍼전파자’로 불리게 되는 이 환자는 좁고 혼잡한 응급실에 며칠간 머물렀고, 그 며칠 사이 같은 공간에 있던 수십 명이 바이러스에 노출된 것으로 파악됐다. 응급실 하나가 도시 전역으로 뻗어나가는 감염망의 진원지가 된 셈이었다. 이 사실이 뒤늦게 확인되면서, 사람들은 묻기 시작했다. 왜 한국의 병원에서는 이렇게 쉽게, 이렇게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감염될 수 있었을까. 6월에 접어들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확진자가 발생한 병원들이 부분 또는 전면 폐쇄됐고, 격리 대상자는 수천 명 단위로 늘어났다. 전국의 학교 수천 곳이 휴업에 들어갔고, 놀이공원과 대형 마트에서 인적이 눈에 띄게 줄었다. 마스크를 구하려는 사람들이 약국 앞에 줄을 섰고, 일부 지역에서는 품귀 현상까지 빚어졌다. 중국인 관광객을 태운 크루즈선이 한국 기항을 취소하는 일도 벌어졌다. 도심 곳곳에 사람이 눈에 띄게 줄어든 풍경은 그 자체로 낯설고 불안한 것이었다. 정부에 대한 불신은 점점 커졌다. 보건복지부 장관이 브리핑에 나설 때마다 “왜 병원 이름을 공개하지 않느냐”는 질문이 쏟아졌다. 서울시장이 정부보다 앞서 특정 병원 관련 정보를 전격 공개하는 이례적인 상황도 벌어졌다. 결국 정부는 여론에 떠밀리듯 메르스 환자가 발생하거나 경유한 병원 명단을 뒤늦게 전면 공개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한국 정부의 요청으로 합동조사단을 파견해 현장을 점검했고, 이 과정에서 한국의 의료 환경에 존재하던 구조적 문제들이 하나둘 수면 위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 문제의 핵심은 다인실 병실과 붐비는 응급실이었다. 당시 한국의 종합병원 병실 상당수는 4~6인실 이상의 다인실 구조였고, 환자와 보호자, 문병객이 한 공간에 뒤섞여 지내는 것이 낯설지 않은 풍경이었다. 응급실 역시 병상 부족으로 환자들이 복도까지 나와 대기하는 일이 흔했다. 이런 환경에서는 한 사람의 호흡기 비말이 순식간에 여러 사람에게 옮겨갈 수 있었다. 게다가 한국 특유의 이른바 ‘닥터 쇼핑’ 문화, 즉 증상이 낫지 않으면 여러 병원을 옮겨 다니며 진료를 받는 관행도 감염 경로를 걷잡을 수 없이 복잡하게 만든 요인으로 지목됐다. 첫 환자가 여러 병원을 전전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여기에 병원 간 정보 공유 체계의 미비함이 겹쳤다. 한 병원에서 의심 증상을 보인 환자가 다른 병원으로 옮겨갈 경우, 그 병원은 이전 병력이나 접촉력을 곧바로 알 방법이 없었다. 응급실 의료진이 환자의 해외 여행력을 묻는 절차 자체가 표준화돼 있지 않았던 점도 초기 발견을 늦춘 원인 중 하나로 꼽혔다. 결국 이 사태를 키운 것은 바이러스의 특별한 위력이라기보다, 이런 여러 겹의 허점이 하필 한 사람의 동선 위에서 동시에 맞물린 결과에 가까웠다. 7월 들어 신규 확진자가 눈에 띄게 줄어들면서 정부는 사실상 사태의 안정화를 언급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완전한 종식 선언이 나온 것은 그보다 한참 뒤인 12월이었다. 그해 국내에서 메르스로 확진된 사람은 정부 공식 집계로 186명, 그중 38명이 숨진 것으로 발표됐다. 격리 대상에 올랐던 사람은 한때 만 명을 훌쩍 넘기도 했다.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발원지보다 오히려 한국에서 더 큰 규모의 유행이 벌어졌다는 사실은, 이 병의 위험성이 병원체 자체보다도 그것을 맞이한 의료 시스템의 준비 상태에 좌우된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로 두고두고 언급됐다. 사태가 지나간 뒤 한국 사회는 여러 방향에서 이 경험을 되짚었다. 감염병 위기 대응 체계가 전면적으로 재정비됐고, 질병관리본부의 권한과 인력이 확대됐다. 병원들은 응급실 혼잡도를 줄이기 위한 개편에 나섰고, 다인실 위주였던 병실 구조도 점진적으로 개선 논의가 이뤄졌다. 감염병 발생 시 정보를 신속하게 공개해야 한다는 원칙도 이때의 시행착오를 거치며 자리를 잡았다. 무엇보다 역학조사와 동선 추적, 격리와 검사 체계를 다루는 실무 경험이 이 시기에 쌓였다는 점은 훗날 다시 언급될 사실이었다. 5년 뒤인 2020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덮쳤을 때 한국이 비교적 신속하게 진단 검사 체계를 갖추고 동선 추적 시스템을 가동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2015년의 뼈아픈 실패가 있었다는 평가가 뒤따랐다. 당시엔 병원 이름 하나 공개하지 못해 우왕좌왕했던 나라가, 훗날 방역 대응의 사례로 자주 거론되는 나라가 된 셈이다. 그해 여름, 마스크를 구하러 줄을 서던 사람들과 텅 빈 응급실 복도를 떠올리는 이들에게 메르스 사태는 여전히 하나의 질문으로 남아 있다. 다음 위기가 왔을 때, 우리는 정말 그때와 다르게 대응할 수 있을 것인가.

작성일 2026. 9.
2010년 3월 26일 밤 9시 22분, 서해 백령도 인근 바다를 순찰하던 해군 초계함 한 척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강한 충격이 발생했다. 배는 순식간에 두 동강이 났고, 함미 쪽은 그대로 바다 밑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캄캄한 밤바다, 영하에 가까운 수온, 그리고 아무런 예고도 없었던 순간이었다. 배에 타고 있던 승조원 100여 명 가운데 절반에 가까운 이들이 그날 이후 다시는 육지를 밟지 못했다. 무엇이 이 배를, 이렇게 순식간에 두 동강 낼 수 있었을까. 사고였을까, 공격이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두고 대한민국은 이후 몇 달간, 그리고 사실 지금까지도 완전히 하나로 합의하지 못했다. 사고를 당한 배는 해군 제2함대 소속 초계함 천안함이었다. 배수량 1200톤급으로, 서해 북방한계선(NLL) 인근 경계 임무를 수행하던 중이었다. 사고 해역은 백령도 서남쪽 해상으로, 남북 간 군사적 긴장이 상시적으로 존재하는 곳이었다. 사고 직후 해군은 초계함이 절반으로 절단된 채 침몰 중이라는 급박한 보고를 받았고, 인근 해군과 해경 함정, 민간 어선까지 동원한 구조 작전이 밤새 이어졌다. 함수 부분에 있던 승조원 상당수는 구조됐지만, 함미와 함께 가라앉은 이들의 생사는 오랫동안 확인되지 않았다. 사고 다음 날부터 정부와 군은 정확한 원인을 밝히기 위해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였다. 초기에는 기뢰 접촉, 좌초, 내부 폭발 등 여러 가능성이 언론을 통해 거론됐다. 국방부는 성급한 단정을 피하며 다국적 전문가와 함께 정밀 조사에 착수하겠다고 밝혔다. 그 사이 실종자 가족들은 백령도와 평택 2함대 사령부를 오가며 생사조차 알 수 없는 시간을 견뎌야 했다. 사고 발생 며칠 뒤 잠수 요원들이 침몰한 함미 부분에 접근해 시신을 수습하기 시작했지만, 거센 조류와 낮은 시야 때문에 작업은 극도로 더뎠다. 이 과정에서 수색 작업에 투입됐던 민간 어선 한 척이 다른 사고로 침몰해 선원들이 목숨을 잃는 안타까운 일도 있었고, 실종자 수색에 나섰던 해군 특수전 요원 한 명도 작업 도중 순직한 것으로 알려졌다. 배 안에 있던 이들이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과, 시간이 지날수록 옅어지는 그 가능성 사이에서 온 국민이 초조하게 뉴스를 지켜보던 시기였다. 함미가 인양된 것은 사고로부터 보름 남짓 지난 뒤였다. 절단면을 육안으로 확인한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곧바로 술렁임이 일었다. 절단면이 매끄럽지 않고 안쪽으로 심하게 휘어져 있었던 것이다. 이는 내부 폭발보다는 외부에서 가해진 강한 충격, 그것도 물기둥을 동반하는 비접촉 수중 폭발의 특징에 가깝다는 분석이 나왔다. 함체 상단부가 아래에서 위로 밀려 올라간 듯한 손상 형태 역시 그런 추정에 힘을 실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무엇이 폭발했는지, 누가 그것을 일으켰는지 알 수 없었다. 조사는 이제 막 시작이었다. 정부는 5월 초, 민간과 군, 그리고 미국·영국·호주·스웨덴 등 여러 나라 전문가가 참여한 합동조사단을 꾸려 그간의 조사 결과를 정리해 발표하겠다고 예고했다. 이 발표를 앞두고 여러 추측이 오갔다. 일부에서는 노후 기뢰의 우발적 폭발 가능성을, 일부에서는 좌초 후 파손 가능성을 제기했다. 야권 일각과 일부 과학자들은 정부의 조사 방식과 속도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며, 결론을 미리 정해두고 짜맞추는 것 아니냐는 의혹의 시선을 보내기도 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조사단이 서해 바닥에서 무언가를 끌어올렸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다름 아닌, 폭발한 무기의 잔해로 추정되는 금속 파편이었다. 그해 5월 20일, 합동조사단은 서울 용산 국방부 청사에서 그동안의 조사 결과를 공식 발표했다. 결론은 천안함이 북한이 제조한 것으로 추정되는 어뢰의 수중 폭발로 침몰했다는 것이었다. 조사단은 사고 해역 인근에서 인양한 어뢰 추진체 부품을 근거로 제시했다. 그 부품 안쪽에는 한글로 손글씨처럼 적힌 '1번'이라는 표기가 남아 있었는데, 조사단은 이것이 북한이 그간 수출한 어뢰 도면에서 확인되던 표기 방식과 일치한다고 설명했다. 여기에 폭발로 생긴 화약 성분 분석 결과와 지진파·음향 관측 자료, 함체 손상 형태에 대한 시뮬레이션 결과까지 종합해, 조사단은 북한 잠수정에서 발사된 어뢰가 함저 부근에서 폭발하며 배를 두 동강 냈다고 결론지었다. 이 발표는 순식간에 전 세계 뉴스의 머리기사가 됐다. 북한은 이 발표를 즉각 부인했다. 자신들과 무관한 일이며, 조사 결과 자체가 조작됐다는 주장을 내놓았다. 남북 관계는 그대로 급격히 얼어붙었다. 정부는 발표 나흘 뒤인 5월 24일, 개성공단을 제외한 남북 교역과 교류를 사실상 전면 중단하는 조치를 발표했다. 이른바 '5·24 조치'로 불리는 이 대북 제재는 이후 오랫동안 남북 경제협력의 상징적 단절선으로 남게 된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역시 이 사건을 두고 논의를 벌였지만, 중국과 러시아의 반대로 북한을 직접 가해자로 명시하지는 못한 채, 공격을 규탄하되 가해 주체는 특정하지 않는 절충된 의장성명을 채택하는 데 그쳤다. 국제사회조차 완전히 한목소리를 내지 못한 셈이었다. 그러나 정부의 공식 발표 이후에도 논쟁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국내 일부 과학자와 시민단체, 정치권 일각에서는 '1번' 표기의 잉크가 폭발 열에도 타지 않은 점, 어뢰 부품의 부식 상태가 오랜 기간 해저에 있었던 것치고는 지나치게 깨끗하다는 점 등을 들어 조사 결과에 의문을 제기했다. 이들은 좌초나 다른 원인에 의한 사고 가능성, 혹은 조사 과정의 신뢰성 자체를 문제 삼았다. 이에 대해 조사단과 정부는 각각의 의혹에 대해 추가 설명과 재검증 결과를 내놓으며 반박했지만, 이 논쟁은 완전히 해소되지 못한 채 이후 수년간 법정 공방과 정치적 논쟁으로 이어졌다. 천안함을 둘러싼 이 두 개의 시선 — 북한의 공격이 명백하다는 입장과, 공식 조사 결과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는 입장 — 은 지금까지도 완전히 좁혀지지 않은 채 남아 있다. 분명한 사실은, 그날 밤 서해 바다에서 실제로 마흔여섯 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진 젊은 해군 장병들이 목숨을 잃었다는 것이다. 이들 대부분은 이십 대 초중반의 나이였고, 훈련을 마치고 임무에 투입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이들도 있었다. 사고 이후 이들의 이름은 국립대전현충원에 나란히 새겨졌고, 유가족들은 매년 3월이면 그 앞에 모여 오래도록 자리를 지킨다. 사건의 원인을 둘러싼 논쟁이 아무리 뜨거워도, 그 논쟁이 이들의 죽음이라는 사실 자체를 흐릿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목소리가 시간이 지나며 오히려 더 커졌다. 천안함 사건은 이후 한국 사회에서 안보와 정치가 어떻게 뒤엉키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상징적 장면으로 자주 소환된다. 군은 이 사건을 계기로 서해 경계 태세와 대잠수함 탐지 체계를 대대적으로 점검했고, 남북 관계는 이 사건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냉각기를 겪었다. 해마다 3월 26일이 다가오면 언론은 다시 이 사건을 조명하고, 그때마다 못다 푼 의문들도 함께 소환된다. 다만 확실한 것은, 그날 백령도 앞바다에서 갑자기 두 동강 난 배 안에 있던 이들에게는 그 밤이 삶의 마지막 순간이었다는 사실이다. 진실을 둘러싼 논쟁이 언제 어떻게 완전히 정리될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지만, 그 바다 밑에 가라앉았던 배의 잔해처럼, 이 사건이 남긴 질문들 역시 쉽게 가라앉지 않은 채 여전히 수면 위에 떠 있다.

작성일 2026. 9.
1997년 11월 21일 밤, 서울 명동의 한 환전소 앞에는 늦은 시간까지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원화를 조금이라도 더 나은 값에 달러로 바꾸려는 사람들이었다. 같은 시각 정부 청사에서는 강경식 경제부총리가 다음날 있을 대국민 발표를 앞두고 마지막 문구를 다듬고 있었다. 불과 며칠 전까지도 정부는 "우리 경제의 펀더멘털은 튼튼하다"고 공언해왔다. 그런데 이제 와서 국제통화기금,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한다는 발표를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무엇이 바뀐 것일까. 아니, 애초에 정부는 이 사태를 정말 예상하지 못했던 것일까. 그 답을 이해하려면 시계를 몇 달, 몇 년 더 앞으로 돌려야 한다. 1990년대 중반 한국 경제는 겉으로는 화려했다. 삼성, 현대, 대우 같은 대기업들은 문어발식으로 사업을 확장했고, 은행과 종합금융회사(종금사)들은 해외에서 단기로 돈을 빌려와 국내 기업에 장기로 빌려주는 방식으로 몸집을 불렸다. 짧게 빌려서 길게 굴리는 이 구조는 돈이 계속 잘 돌 때는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어느 한 곳에서 균열이 생기면 순식간에 전체가 흔들릴 수 있는 위태로운 구조이기도 했다. 균열은 1997년 초부터 시작됐다. 1월 재계 순위 14위였던 한보철강이 부도를 냈다. 정치권과의 유착 의혹까지 불거지며 파장이 컸다. 이어 삼미그룹, 진로그룹, 대농그룹이 잇따라 무너졌고, 7월에는 기아그룹까지 부도 위기에 몰렸다. 한 해 동안 굴지의 대기업 집단이 줄줄이 쓰러지는 광경을, 사람들은 낯설게 바라봤다. "설마 나라 전체가 흔들리기야 하겠느냐"는 생각이 여전히 지배적이었다. 그 사이 태평양 건너 동남아시아에서는 더 큰 파도가 일고 있었다. 1997년 7월 태국이 자국 통화인 바트화의 고정환율제를 포기하면서 바트화 가치가 폭락했고, 이 충격은 곧 필리핀,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로 번졌다. 외국 투자자들은 아시아 신흥국 전반에 대한 신뢰를 급격히 거두어들이기 시작했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었다. 한국 기업과 금융회사들이 짊어지고 있던 막대한 단기 외채가 이제는 언제 갚아야 할지 모르는 시한폭탄처럼 여겨지기 시작한 것이다. 10월로 접어들면서 외국계 금융회사들은 한국 종금사와 은행에 빌려준 단기 자금을 만기 연장 없이 회수하기 시작했다. 원화 가치는 떨어지고 외환보유고는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그런데도 정부의 공식 언어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환율 방어에 문제없다", "외환보유고는 충분하다"는 발표가 반복됐다. 시장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오히려 정부가 뭔가를 감추고 있는 것 아니냐는 의심이 퍼지기 시작했다. 11월에 들어서자 상황은 눈에 띄게 급박해졌다. 종합주가지수는 곤두박질쳤고, 원-달러 환율은 하루가 다르게 치솟았다. 외환당국은 보유 외환을 풀어 환율을 방어하려 했지만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11월 중순, 정부 내부에서는 이미 IMF행이 불가피하다는 의견이 힘을 얻고 있었다는 사실이 훗날 알려졌다. 하지만 공개적으로는 여전히 "자체적으로 해결 가능하다"는 메시지가 나갔다. 왜 정부는 끝까지 그렇게 말했을까 하는 물음은, 이후 오랫동안 이 사건을 둘러싼 가장 뼈아픈 질문으로 남게 된다. 11월 19일, 강경식 부총리가 경질되고 임창열 신임 부총리가 취임했다. 그리고 이틀 뒤인 11월 21일 밤, 정부는 마침내 IMF에 유동성 지원을 공식 요청하겠다고 발표했다. 다음 날 아침 신문 1면에는 "IMF 구제금융 요청"이라는 활자가 큼지막하게 박혔다. 많은 국민들에게 이 소식은 청천벽력과도 같았다. 불과 얼마 전까지 정부가 "문제없다"고 말해왔던 나라가, 하루아침에 국제기구에 손을 벌려야 하는 처지가 됐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다. 12월 3일, 한국 정부와 IMF는 구제금융 합의서에 서명했다. 지원 규모는 IMF 자금과 세계은행, 아시아개발은행, 그리고 미국을 비롯한 주요국의 양자 지원까지 합쳐 총 550억 달러 이상으로 알려졌으며, 이는 당시 기준으로 IMF 역사상 최대 규모의 구제금융 중 하나로 꼽혔다. 그 대가로 한국은 고금리 정책, 강도 높은 구조조정, 자본시장 개방 확대 등 IMF가 요구하는 여러 조건들을 받아들여야 했다. 12월 3일은 이후 "국가부도의 날"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오래도록 회자되는 날이 됐다. 그런데 이 사태의 전개를 뜯어보면 석연치 않은 대목이 하나 있다. 정부가 위기 내내 발표해온 외환보유고 수치와, 실제로 즉시 쓸 수 있었던 '가용' 외환보유고 사이에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발표된 총 외환보유고에는 시중은행에 이미 빌려주었거나 단기간에 회수하기 어려운 자금까지 포함되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다시 말해 겉으로 보이는 숫자와, 정작 급할 때 정부가 손에 쥐고 쓸 수 있는 돈 사이에는 상당한 간극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 사실이 이후 국정감사와 언론 보도를 통해 알려지면서, "정부가 사태의 심각성을 알고도 국민에게 제때 알리지 않은 것 아니냐"는 비판이 거세게 일었다. 실제로 위기가 코앞에 닥친 순간까지도 정부 고위 관계자들의 공개 발언은 낙관적인 어조를 유지하고 있었고, 이는 훗날 정부의 위기 대응 방식 전반에 대한 논란으로 이어졌다. 결국 많은 이들이 나중에서야 알게 된 진실은 이런 것이었다. 한국은 그해 가을 이미 사실상 외환위기 상태에 진입해 있었고, 정부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 실체를 온전히 드러내지 않은 채 시간을 벌어보려 했다는 것. 그 시간 벌기가 성공했다면 역사는 다르게 쓰였을지도 모르지만, 결과적으로는 협상의 주도권을 잃은 채 더 불리한 조건으로 IMF와 마주해야 했다는 평가가 많다. "펀더멘털은 튼튼하다"던 말과, 불과 며칠 뒤 국가부도 위기를 인정해야 했던 현실 사이의 간극. 그 간극이야말로 이 사건이 오래도록 국민들의 마음에 배신감처럼 남게 된 이유였다. 위기의 파장은 예상보다 훨씬 넓고 깊었다. IMF 처방에 따른 고금리 정책은 그렇지 않아도 어려운 기업들을 벼랑 끝으로 몰았고, 대기업과 은행의 구조조정이 전방위로 진행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직장을 잃었다. 1998년 실업률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이 치솟았고, 거리에는 노숙인이 눈에 띄게 늘었다는 보도가 이어졌다. 명예퇴직과 정리해고라는 말이 일상어처럼 쓰이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부터였다. 가정이 흔들리고, 중산층이라 믿었던 삶의 기반이 무너지는 경험을 한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 와중에도 국민들이 보여준 대응은 인상적이었다. 1998년 초 전국적으로 벌어진 '금 모으기 운동'에는 결혼반지, 아이 돌반지, 메달 같은 개인 소장 금붙이를 들고 나온 시민들의 행렬이 이어졌다고 전해진다. 이렇게 모인 금은 수출용으로 활용돼 외환 확보에 보탬이 됐다는 평가를 받았다. 물론 이 운동만으로 위기가 해소된 것은 아니었지만, 국가적 위기 앞에서 자발적으로 힘을 모으려 했던 당시의 분위기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으로 지금도 종종 언급된다. 정치적으로도 이 사태는 큰 파장을 남겼다. 1997년 12월 대통령 선거는 외환위기 한복판에서 치러졌고, 김대중 후보가 당선되며 헌정사상 최초의 여야 정권교체가 이뤄졌다. 새 정부는 출범 직후부터 IMF와의 이행 약속을 지키는 한편, 기업 구조조정과 금융개혁을 강도 높게 추진해야 하는 과제를 떠안았다. 이후 한국은 예정보다 이른 2001년 8월 IMF 차입금을 조기 상환하며 관리체제를 벗어났다고 알려져 있다. 흔히 이를 두고 "IMF 졸업"이라 부르며 위기 극복의 성과로 평가하는 시각이 있는 한편, 그 과정에서 노동시장 유연화가 가속화되고 비정규직이 급증하는 등 사회 구조 자체가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재편됐다는 지적도 함께 나온다. 지금도 1997년을 살았던 세대에게 그해 겨울은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다니던 회사가 하루아침에 사라지고, 안정적이라 믿었던 것들이 얼마나 쉽게 흔들릴 수 있는지를 목격한 시간이었다. 동시에 그것은 화려해 보이던 성장의 이면에, 얼마나 위태로운 구조와 감춰진 숫자들이 자리하고 있었는지를 뒤늦게 깨닫게 된 시간이기도 했다. 그날 정부가 좀 더 일찍, 좀 더 솔직하게 위기를 알렸더라면 무엇이 달라졌을까.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지금도 명확히 내려지지 않은 채, 매해 11월이면 한 번씩 다시 소환되는 물음으로 남아 있다.

작성일 2026. 9.
2001년 9월 11일 오전 9시 28분, 미국 클리블랜드 항공관제소의 모니터 앞에 앉아 있던 관제사는 헤드셋 너머로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 비명 같기도 하고 실랑이 같기도 한 소음, 그리고 뒤이어 들려온 낯선 억양의 남자 목소리. "우리는 폭탄을 갖고 있다. 조용히 앉아 있어라." 관제사가 응답을 요청했지만 돌아온 건 침묵뿐이었다. 화면 속에서 뉴저지 뉴어크 공항을 떠나 캘리포니아로 향하던 유나이티드항공 93편은 이미 정상 항로를 벗어나 있었다. 이 시각, 뉴욕의 세계무역센터 두 동은 이미 화염에 휩싸여 있었고 펜타곤에서도 검은 연기가 치솟고 있었다. 남은 것은 하늘 위에 떠 있는 네 번째 비행기 하나뿐이었다. 그 비행기가 어디로 향하고 있었는지, 그리고 그 안에서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그날 오전 내내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날 아침의 시작은 지극히 평범했다. 미국 동부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고, 아메리칸항공 11편과 유나이티드항공 175편은 각각 보스턴에서 로스앤젤레스로 향하는 정기 항공편으로 이륙했다. 오전 8시 46분, 11편이 뉴욕 세계무역센터 북쪽 타워에 충돌했다. 처음 이 소식을 접한 사람들 대부분은 소형 항공기의 항로 이탈 사고로 여겼다. 뉴스 화면에는 불타는 타워의 모습이 반복해서 나왔고, 방송사들은 "조종 실수로 추정된다"는 식의 설명을 내보냈다. 그러나 17분 뒤인 9시 3분, 175편이 생방송 카메라 앞에서 남쪽 타워로 날아들었다. 전 세계가 동시에 지켜본 이 장면으로, 사고가 아니라는 사실이 명백해졌다. 이어 9시 37분, 아메리칸항공 77편이 워싱턴 D.C.의 국방부 청사 펜타곤 서쪽 벽면에 충돌했다. 미국 항공당국은 곧바로 전례 없는 조치를 내렸다. 미국 영공에 떠 있는 모든 민간 항공기의 즉시 착륙 명령이었다. 그런데 이 명령이 떨어진 순간, 레이더에는 여전히 항로를 벗어나 워싱턴 방향으로 날아가는 항공기 한 대가 남아 있었다. 유나이티드 93편이었다. 93편은 원래 예정보다 40분 넘게 늦게 뉴어크를 이륙했다. 이 지연이 훗날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는지, 그날 탑승했던 37명의 승객과 7명의 승무원 중 그 누구도 알 수 없었다. 비행기가 이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조종석은 장악됐다. 관제소와의 교신이 끊겼고, 비행기는 갑자기 기수를 돌려 워싱턴 방향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기내에 있던 승객들은 처음엔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다. 하지만 좌석 등받이에 설치된 공중전화와 일부 승객이 소지하고 있던 휴대전화를 통해, 그들은 지상의 가족들과 통화를 시도했다. 그리고 그 통화들을 통해 오전 사이 뉴욕과 워싱턴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하나둘 전해 들었다. 자신들이 타고 있는 비행기 역시 같은 방식의 공격에 이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승객들이 깨닫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지상에서는 이미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이 번지고 있었다. 뉴욕에서는 소방관과 경찰이 붕괴 직전의 건물 안으로 진입해 대피를 돕고 있었고, 오전 9시 59분 남쪽 타워가 먼저 무너져 내렸다. 이어 10시 28분에는 북쪽 타워마저 붕괴했다. 110층짜리 두 건물이 차례로 주저앉는 모습은 이후 몇 년간 전 세계 뉴스 화면에서 가장 많이 반복 재생된 장면 중 하나가 됐다. 이 붕괴로 건물 안에 있던 사람들과 구조 활동을 벌이던 소방관, 경찰관들 상당수가 목숨을 잃은 것으로 알려졌다. 펜타곤에서도 화재 진압과 구조 작업이 이어졌다. 미국 전역의 공항이 폐쇄됐고, 대통령은 플로리다 방문 일정 중 소식을 보고받은 뒤 전용기 에어포스원에 탑승해 행선지를 밝히지 않은 채 이동하고 있었다. 워싱턴 상공에는 전투기가 긴급 발진해 정체불명의 항공기를 요격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돌았다. 그리고 그 표적이 될 수 있는 마지막 항공기, 93편은 여전히 항로 위에 있었다. 93편이 정확히 어디를 향하고 있었는지는 지금까지도 완전히 확정되지 않았다. 다만 이후 조사 기관인 9·11 위원회는 조종석을 장악한 인물 중 한 명이 사전에 워싱턴 상공의 항로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는 정황을 근거로, 목표가 미국 국회의사당이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추정했다. 백악관을 노렸을 가능성을 제기하는 분석도 있었지만, 어느 쪽도 완전히 입증되지는 못했다. 확실한 건 이 비행기가 계속 날아갔다면 워싱턴 도심의 상징적인 건물 중 하나에 도달했을 것이라는 점이었다. 그리고 그 비행이 실제로 그곳까지 이어지지 못한 이유는, 한동안 세상에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초기에는 군이 격추했다는 소문마저 돌았다. 93편 기내에서 걸려온 통화 기록들이 하나둘 공개되면서, 그날 하늘 위에서 벌어진 일의 윤곽이 서서히 드러났다. 승객 중 한 명인 토드 비머는 지상 통신원과 연결된 전화를 끊지 않은 채 통화를 이어갔다. 그는 몇몇 승객들과 짧게 의견을 나눈 뒤, 무언가 행동에 나서기로 결심한 듯한 말을 통신원에게 남겼다. 함께 있던 다른 이들에게 건넨 것으로 알려진 그 말은 이후 "렛츠 롤(Let's roll)"이라는 짧은 문장으로 널리 알려지게 됐다. 다른 승객들 역시 각자의 가족에게 전화를 걸어 뉴욕과 워싱턴에서 일어난 일을 전해 듣고, 이 비행기 역시 같은 목적으로 납치됐다는 사실을 서로에게 알렸다. 몇몇은 가족에게 마지막 인사를 전했다. 그리고 승객들은 함께 움직이기로 했다. 오전 10시를 조금 넘긴 시각, 관제탑과 지상 통신 기록, 그리고 기체에 장착돼 있던 조종실 음성기록장치는 이후 조사 과정에서 승객들이 조종석 문을 향해 돌진했음을 보여줬다. 카트를 밀고 나가거나 몸으로 문을 부딪치는 소리, 격렬한 몸싸움을 짐작케 하는 소음이 녹음돼 있었다. 승객들이 조종석 근처까지 접근했다는 정황도 확인됐다. 하지만 그 직후, 비행기는 급격히 기울며 추락하기 시작했다. 오전 10시 3분, 유나이티드 93편은 펜실베이니아주 섕크스빌 인근의 한 벌판에 떨어졌다. 탑승했던 44명 전원이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비행기가 목표로 추정되는 지점까지 20여 분 거리를 남겨둔 시점이었다. 이 비행기가 워싱턴 도심이 아닌 텅 빈 들판에 떨어졌다는 사실은, 이후 수사와 조사가 진행되면서 점차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승객들이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다면 이 비행기는 다른 세 대의 항공기와 마찬가지로 상징적인 건물에 충돌했을 가능성이 컸다. 그러나 기내에 있던 평범한 시민들, 사업가와 대학생, 노부인과 하키 코치 등으로 알려진 이들이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함께 움직이기로 한 그 짧은 결정이, 결과적으로 더 큰 인명 피해를 막았을 것이라는 해석이 힘을 얻었다. 물론 이들이 정확히 무엇을 목표로 움직였는지, 조종석까지 완전히 진입했는지는 기록만으로 전부 확인되지는 않는다. 다만 그 벌판에 남은 잔해와 녹음 기록은, 마지막 순간까지 이들이 가만히 앉아 있지 않았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그날 하루 동안 미국 전역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은 뉴욕과 워싱턴, 섕크스빌을 합쳐 약 3,000명에 이르는 것으로 전해진다. 세계무역센터에서만 2,000명이 넘는 희생자가 나온 것으로 알려졌고, 구조 활동 중 순직한 소방관과 경찰관도 수백 명에 달했다고 전해진다. 펜타곤에서도 군인과 민간인이 함께 목숨을 잃었다. 희생자 중에는 미국 국적자뿐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 출신의 사람들도 포함돼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날 오후, 미국 대통령은 대국민 연설을 통해 이번 공격이 테러 조직에 의한 것이라고 밝혔고, 이후 수사 결과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조직 알카에다와 그 지도자로 지목된 인물이 배후로 지목됐다. 다만 이 공격을 계획하고 실행한 세부 지휘 체계에 대해서는 이후로도 여러 조사와 청문회를 거치며 보완이 이어졌다. 9·11 테러는 그날 하루의 비극으로 끝나지 않았다. 미국은 이후 아프가니스탄을 상대로 군사 작전을 개시했고, 뒤이어 이라크 전쟁으로까지 이어지는 이른바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공항 보안 체계는 근본적으로 바뀌어 미국 교통안전청(TSA)이 신설됐고, 액체류 반입 제한이나 신발 검색 같은 지금은 익숙한 절차들이 이때부터 자리 잡았다. 애국법으로 불리는 광범위한 감시·수사 권한 확대 법안이 통과됐고, 이는 훗날 개인정보와 시민권 침해 논란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세계무역센터가 있던 자리에는 오랜 재건 논의 끝에 새로운 건물과 추모 공원이 들어섰고, 희생자들의 이름이 새겨진 두 개의 거대한 수공(水孔) 형태 기념물이 조성됐다. 펜타곤과 섕크스빌에도 각각 추모 시설이 세워졌다. 유나이티드 93편이 떨어진 섕크스빌의 벌판에는 지금도 매년 9월 11일이면 사람들이 찾아온다. 그곳에 세워진 기념관에는 그날 오전 승객들이 나눴던 통화의 일부 기록과, "렛츠 롤"이라는 짧은 한마디가 새겨져 있다. 그 말을 실제로 누가 먼저 꺼냈는지, 그 순간 조종석 문 너머에서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여전히 완전한 그림으로 맞춰지지 않는다. 다만 텅 빈 하늘 위, 각자 다른 목적지로 향하던 낯선 사람들이 서로를 향해 몸을 일으켰다는 사실 하나만은 분명하게 남아 있다. 그 결정이 있었기에 워싱턴의 어느 건물은 그날 그대로 남을 수 있었다는 것을, 지금도 매해 9월이면 이 벌판을 찾는 사람들은 잊지 않고 기억한다.

작성일 2026. 8.
2012년 가을, 뉴욕 타임스퀘어의 대형 전광판에 한 한국 남자가 말을 타는 시늉을 하며 우스꽝스럽게 춤을 추는 영상이 반복 재생되고 있었다. 그 아래 인도에는 관광객들이 걸음을 멈추고 똑같은 동작을 따라 하며 휴대폰으로 서로를 찍고 있었다. 며칠 뒤 백악관 정례 브리핑에서는 한 기자가 대변인에게 진지한 얼굴로 "오바마 대통령도 강남스타일 춤을 아느냐"고 물었고, 대변인은 웃음을 참으며 답을 얼버무렸다. 영어 가사가 거의 없는, 한국의 한 지역 이름을 제목으로 내건 노래가 어떻게 전 세계 거리와 텔레비전 뉴스, 심지어 백악관 브리핑룸까지 파고들었을까. 그리고 그렇게까지 세계를 뒤집어 놓고도, 이 노래는 정작 미국 빌보드 차트 정상에는 끝내 오르지 못했다. 그 이유를 아는 사람은 의외로 많지 않다. 노래를 부른 가수 박재상, 활동명 싸이는 2012년 여름 이 곡을 내놓기 전까지도 해외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다. 국내에서는 2001년 데뷔 이후 줄곧 화제를 몰고 다닌 뮤지션이었다. 말끔한 외모와 칼군무로 무장한 여느 아이돌과 달리, 그는 통통한 체형과 과장된 표정, 짓궂은 무대 매너로 오히려 사랑받아온 이색적인 캐릭터였다. 스스로를 "딴따라"라 부르며 망가지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가 그의 트레이드마크였다. 2010년 YG엔터테인먼트에 합류한 그는 2012년 7월, 여섯 번째 정규 앨범의 타이틀곡으로 '강남스타일'을 발표한다. 곡의 제목이 가리키는 '강남'은 서울 한강 이남의 부촌으로, 고급 아파트와 명품 매장, 화려한 밤문화로 상징되는 동네다. 노래는 그 강남의 소비적이고 허세 가득한 라이프스타일을 흉내 내면서 동시에 비꼬는, 일종의 자기 풍자였다. 정작 뮤직비디오 속 싸이는 놀이터의 어린이용 회전목마 위에서, 사우나에서, 관광버스 안에서 우스꽝스러운 몸짓을 반복하며 그 화려함과는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준다. 화려함을 노래하면서 그 화려함을 조롱하는 이 이중적인 태도가, 훗날 언어를 뛰어넘어 세계인이 이 곡에 반응하게 만든 첫 번째 열쇠였다는 분석이 많다. 국내에서는 발매와 동시에 각종 음원 차트 1위에 오르며 순조롭게 흥행했다. 그런데 이 곡의 진짜 이야기는 한국이 아니라 그 다음 무대에서 시작된다. 유튜브에 올라온 뮤직비디오의 조회수가 이상하리만치 빠른 속도로 불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에는 동남아시아, 이어 미국 서부의 몇몇 유명인과 연예 관계자들의 소셜미디어 계정에서 이 영상이 공유되기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특유의 '말춤'이 워낙 단순하고 따라 하기 쉬웠던 탓에, 언어를 몰라도 누구나 손목을 채찍질하듯 흔들며 흉내 낼 수 있었다는 점도 확산에 결정적이었다. 8월이 지나면서는 미국 주요 방송사들이 앞다투어 이 낯선 한국 가수를 소개하기 시작했고,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 갔다. 9월, 싸이는 미국 MTV 비디오 뮤직 어워드 무대에 올라 1990년대를 풍미한 힙합 스타 엠씨 해머와 나란히 말춤을 추며 미국 대중문화의 심장부에 자신의 이름을 확실히 새겼다. 비슷한 시기 그는 유엔 사무총장 반기문과의 만남에서도 화제를 모았는데, 이 자리에서 반 총장이 직접 말춤 동작을 따라 하는 장면이 언론에 포착되며 또 한 번 화제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팝스타 브리트니 스피어스를 비롯한 세계적인 유명인들이 앞다투어 패러디 영상을 올렸고, 학교 운동회나 결혼식, 군부대 회식 자리에서까지 이 춤을 따라 추는 영상이 쏟아졌다. 노래를 몰라도 춤은 아는, 이상한 상황이 전 세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고 있었다. 유튜브 조회수는 매일 최고 기록을 경신했다. 그해 말에는 유튜브 역사상 가장 많은 '좋아요'를 받은 영상으로 기네스 세계기록에 등재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조회수는 수억 회를 넘어 훗날 십수억 회에 이르렀다고 알려진다. 여기에는 뜻밖의 뒷이야기도 있다. 당시 유튜브의 조회수 표시 시스템은 32비트 정수로 설계되어 있어 약 21억 회 이상은 숫자로 표시할 수 없는 구조였는데, '강남스타일'의 조회수가 그 한계에 근접하면서 유튜브 측이 부랴부랴 시스템을 개편해야 했다는 일화가 있다. 노래 한 곡이 실리콘밸리의 서버 설계를 바꿔놓은 셈이었다. 그러나 정작 모두가 예상했던 '빌보드 핫100 1위'라는 목표는 좀처럼 손에 잡히지 않았다. '강남스타일'은 빌보드 메인 싱글차트에서 몇 주간 2위 자리에 머물렀는데, 그 위에는 마룬 5의 'One More Night'이 굳건히 버티고 있었다. 한 주, 두 주, 세 주가 지나도 순위는 뒤집히지 않았다. 언론은 연일 "이번 주는 1위를 차지할까"라는 기사를 쏟아냈지만 매번 결과는 같았다. 결국 '강남스타일'은 7주 연속 2위라는, 어찌 보면 1위보다 더 이례적인 기록을 세우며 끝내 정상에는 오르지 못한 채 차트에서 서서히 내려왔다. 전 세계를 뒤흔든 노래가, 정작 그 인기를 가장 정직하게 숫자로 보여주는 무대의 꼭대기에는 앉지 못한 것이다. 많은 이들이 이 아이러니를 두고 의아해했다. 세계인이 다 아는 노래인데, 왜 정상만은 내주지 않았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강남스타일' 현상 자체의 본질과 맞닿아 있다는 해석이 있다. 빌보드 핫100 순위는 음원 판매량, 라디오 방송 횟수, 스트리밍 수치를 종합해 산정되는데, '강남스타일'의 폭발력은 유튜브 조회수와 화제성, 즉 '보는 것'에 압도적으로 쏠려 있었다. 반면 미국 라디오 방송국들은 한국어 가사의 낯선 노래를 정규 편성에 적극적으로 넣는 데 상대적으로 소극적이었고, 실제 음원 구매로 이어지는 비율도 스트리밍 열풍에 비해 낮았다. 다시 말해 '강남스타일'은 기존의 음악 산업 구조가 측정하던 인기와는 다른 종류의 인기, 즉 밈과 패러디와 공유로 만들어진 새로운 형태의 지구적 유행이었던 셈이다. 언어의 장벽을 넘어선 것은 노래의 가사가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유머와 자기 풍자, 그리고 누구나 3초 만에 따라 할 수 있는 춤동작이었다. 빌보드 순위표는 이 새로운 현상을 완전히는 담아내지 못한 낡은 자였을 뿐이다. 돌이켜 보면 '강남스타일'이 터진 시점도 절묘했다. 유튜브와 페이스북, 트위터가 전 세계적으로 막 대중화되어 국경을 넘는 밈의 확산 속도가 그 어느 때보다 빨라진 시기였고, 비영어권 콘텐츠가 서구 미디어의 승인 없이도 스스로 폭발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준 초기 사례 중 하나였다. 이전까지 해외 진출을 노리던 한국 가수들은 대개 영어 앨범을 내거나 현지 활동을 병행하며 오랜 시간을 들여 인지도를 쌓아야 했다. 그러나 싸이는 정반대로, 지극히 한국적이고 지역적인 소재를 다룬 한국어 노래로, 그것도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세계의 문을 열어젖혔다. 강남의 허세를 비웃던 노래가,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이라는 나라의 문화적 위상을 세계에 각인시키는 상징이 되어버린 것이다. 싸이는 이후 미국 유명 프로듀서와 함께 후속곡 '젠틀맨'을 발표하며 반짝 열풍을 이어가려 했지만, '강남스타일' 만한 파급력을 다시 만들어내지는 못했다. 어쩌면 그 정도의 우연과 타이밍이 겹치는 순간은 두 번 오기 어려운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열어놓은 문은 이후로도 계속 열려 있었다. 몇 년 뒤 방탄소년단을 비롯한 한국 아이돌 그룹들이 빌보드 메인 차트 정상을 실제로 차지하고, 한국 드라마와 영화가 세계적인 스트리밍 서비스의 상위권을 채우는 시대가 열렸을 때, 많은 이들은 그 출발점 중 하나로 이 우스꽝스러운 말춤을 떠올렸다. 정상에는 끝내 오르지 못했지만, 그 누구보다 먼저 세계의 문턱을 넘어선 노래로 말이다. 지금도 어디선가 결혼식 피로연이나 학교 축제에서 이 낡은 말춤이 흘러나올 때마다, 사람들은 2012년 그 여름을 떠올리며 웃는다.

작성일 2026. 8.
1994년 10월 21일 오전 7시 40분 무렵, 서울 성동구와 강남구를 잇는 성수대교 위에는 여느 아침처럼 차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등교하는 학생들을 태운 통학버스, 출근길 승용차, 화물차들이 한강을 가로지르는 다리 위에서 신호를 기다리거나 서서히 움직이고 있었다. 다리 아래로는 짙은 갈색 강물이 흐르고 있었고, 위로는 서울의 흔한 출근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리고 몇 초 뒤, 다리의 일부가 그대로 허공으로 꺾여 떨어졌다. 상판 약 48미터가 순식간에 강으로 곤두박질쳤고, 그 위에 있던 차량들도 함께 추락했다. 완공된 지 15년밖에 되지 않은 다리가, 대체 왜 아무런 전조도 없이 이런 식으로 끊어져 버린 걸까. 성수대교는 1979년에 준공된, 당시로서는 서울의 교통난을 해소할 주요 한강 다리 중 하나였다. 트러스 구조로 지어진 이 다리는 강북과 강남을 잇는 실핏줄 같은 역할을 하며 매일 수만 대의 차량을 실어 날랐다. 붕괴가 일어난 그날 아침도 다르지 않았다. 다리 북단 쪽 상판에 서 있던 차량들 중에는 무학여자고등학교 학생들을 태운 통학버스가 있었다. 버스는 다리가 꺾이면서 그대로 한강으로 떨어졌고, 인근을 지나던 다른 승용차와 트럭들도 함께 추락했다. 순식간에 다리 위는 텅 빈 채 끊어진 상판만 남았고, 강물 위로는 부서진 차량과 사람들이 흩어져 있었다. 사고 직후 서울은 충격에 빠졌다. 아침 뉴스는 속보로 다리가 무너졌다는 소식을 전했고, 시민들은 처음엔 오보가 아닐까 되물었다고 전해진다. 소방과 경찰, 해군까지 동원된 구조 작업이 곧바로 시작됐다. 다리 아래 강물 속에 잠긴 차량을 끌어올리고, 부상자를 실어내는 작업이 몇 시간에 걸쳐 이어졌다. 이 사고로 32명이 목숨을 잃고 17명이 다쳤다고 알려져 있다. 사망자 중에는 등교하던 학생들이 다수 포함돼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며, 이 사실은 이후 사고를 두고두고 사회적으로 되새기게 만든 이유가 됐다. 평범한 아침, 평범한 통근길에서 벌어진 일이었다는 점이 사람들을 더욱 아프게 했다. 사고 원인을 둘러싼 궁금증은 곧바로 터져 나왔다. 다리는 특별한 자연재해나 충격 없이 스스로 끊어졌다. 지진도 없었고, 폭발도 없었다. 그렇다면 원인은 다리 자체에 있다는 것이었는데, 문제는 그 다리가 15년 전에 지어진, 당시 기준으로는 나름의 기술력을 갖춘 구조물이었다는 점이었다. 언론과 여론은 곧 부실공사 의혹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준공 당시 시공을 맡았던 건설사, 그리고 이후 다리를 관리해온 서울시의 유지보수 체계에 대한 의문이 쏟아졌다. 다리가 무너지기 전 균열이나 이상 징후가 있었는지, 점검이 제대로 이뤄졌는지를 두고 여러 추측이 나왔지만, 정확한 원인은 아직 조사가 진행 중이었다. 사고 현장에서 수거된 트러스 구조물의 잔해를 분석하는 작업이 이어지면서, 조사 당국은 붕괴의 실마리를 하나씩 찾아가기 시작했다. 다리의 상판을 지탱하던 트러스 연결부에 문제가 있었다는 정황이 드러났다. 이 연결부는 강철 부재들을 용접이나 볼트로 결합해 하중을 분산시키는 핵심 부위였는데, 시공 당시 이 부위의 용접이 부실하게 이뤄졌을 가능성이 제기됐다. 즉, 다리가 처음 지어질 때부터 이미 결함을 안고 있었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여기에 더해 오랜 시간 동안 반복된 차량 하중, 특히 기준을 초과한 과적 화물차의 통행이 서서히 그 취약한 부위에 피로를 축적시켰을 가능성도 함께 지목됐다. 조사가 이어지는 동안 시민들의 분노는 다른 방향으로도 향했다. 다리 하나가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질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동안 당연하게 여겨온 사회 기반시설에 대한 신뢰를 흔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특히 성수대교가 다른 한강 다리들과 함께 정기적인 안전점검 대상이었음에도 이런 결함이 사전에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은 큰 논란을 낳았다. 점검이 형식적으로 이뤄졌던 것은 아닌지, 혹은 점검 기준 자체가 허술했던 것은 아닌지에 대한 의문이 이어졌다. 이 무렵 정부 책임론도 거세지면서, 당시 국무총리와 서울시장 등 관련 책임자들이 이 사고의 여파로 자리에서 물러났다고 알려져 있다. 결국 조사 결과 드러난 것은, 성수대교의 붕괴가 어느 한 가지 원인만으로 설명될 수 없는, 여러 겹의 부실이 쌓여 만들어진 결과라는 사실이었다. 시공 당시 트러스 연결부 용접이 설계 기준에 미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이며, 이는 준공 시점부터 다리에 구조적 취약점을 남겼다는 것이 유력하게 지적됐다. 여기에 이후 15년 동안 이뤄진 유지관리와 안전점검이 이 취약점을 제대로 짚어내지 못했고, 기준을 넘어서는 화물차들의 반복적인 통행이 서서히 균열을 키웠을 가능성이 더해졌다. 다시 말해 이 사고는 처음부터 끝까지 사람이 만들어낸, 그리고 사람이 막을 수 있었던 붕괴였다는 것이 이후 조사와 사회적 평가를 통해 드러난 진실이었다. 하늘이 무너진 게 아니라, 누군가의 방심과 소홀함이 쌓여 무너진 것이었다. 이 사고는 이후 한국 사회에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겼다. 이듬해인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가 뒤따르면서, 성수대교 붕괴는 삼풍 사고와 함께 1990년대 한국의 급속한 성장이 안고 있던 부실공사와 안전불감증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함께 언급되곤 한다. 두 사고를 계기로 시설물의 안전관리를 법적으로 강화하는 제도가 마련됐고, 이는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정기 안전점검 체계의 출발점이 됐다고 평가된다. 붕괴된 성수대교는 이후 다시 건설되어 지금도 한강을 가로지르고 있다. 다리를 오가는 사람들 중 그날의 일을 기억하는 이는 이제 많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해 가을 아침, 등교하던 학생들과 출근하던 시민들이 겪어야 했던 일은, 우리가 매일 무심히 건너는 다리와 길 아래에 무엇이 놓여 있는지를 되묻게 만드는 질문으로 여전히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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