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6. 9. 9. AM 10:15:24 · 조회 6
2016년 9월 12일 저녁 7시 44분, 경상북도 경주시 일대의 아파트 단지에서는 저녁 식사를 마친 사람들이 텔레비전 앞에 모여 있었다. 갑자기 그릇이 달그락거리고 천장의 조명이 흔들렸다. 몇몇은 순간적으로 어지럼증인 줄 알았고, 몇몇은 위층에서 뭔가를 떨어뜨렸나보다 하고 넘겼다. 흔들림은 몇 초 만에 멎었다. 사람들은 다시 밥그릇을 들었고, 텔레비전 소리는 계속 흘러나왔다. 그런데 정확히 48분 뒤, 그보다 훨씬 강한 두 번째 흔들림이 찾아왔다. 이번에는 아무도 자리에 앉아 있지 않았다. 다들 신발도 제대로 신지 못한 채 현관문을 박차고 뛰쳐나갔다. 그날 밤, 경주 사람들은 자신들이 한반도 관측 역사상 가장 강력한 지진의 한복판에 서 있다는 사실을 아직 알지 못했다. 첫 흔들림은 전조였다. 기상청은 이를 규모 5.1의 전진(前震)으로 기록했다. 진앙은 경주시 남남서쪽, 내남면 부근의 지하 약 15킬로미터 지점이었다. 사람들이 안도의 한숨을 돌리던 그 48분 사이, 지하에서는 단층이 다시 크게 미끄러지고 있었다. 밤 8시 32분, 규모 5.8의 본진이 발생했다. 이는 1978년 기상청이 근대적 지진 계기 관측을 시작한 이래 한반도에서 관측된 가장 강한 지진으로 기록됐다. 진동은 경주는 물론 부산, 대구, 울산을 지나 멀리 서울에서도 체감될 정도로 퍼져나갔다. 전국 각지에서 “건물이 흔들렸다”, “엘리베이터가 멈췄다”는 신고가 동시다발적으로 쏟아졌다. 지진 직후 가장 먼저 눈에 띈 피해는 경주 시내 낡은 건물들에서 나타났다. 오래된 주택의 기와가 우수수 떨어져 골목에 흩어졌고, 상가 건물 외벽에 금이 갔다. 신라 천년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경주에서는 문화재 피해도 우려됐다. 첨성대는 기울기가 미세하게 더 커진 것으로 조사됐고, 첨성대를 비롯한 일부 석조 문화재에서 균열과 낙석이 확인됐다는 보도가 이어졌다. 다행히 인명 피해로 이어질 만한 대형 붕괴는 보고되지 않았지만, 20명 안팎의 부상자가 발생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부분 놀라서 넘어지거나 대피 과정에서 다친 경우였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그날 밤 진짜 공포는 무너진 건물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었다. “한국은 지진 안전지대”라는 오래된 믿음이 그 순간 깨졌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태어나 처음으로 지진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아파트 주민들은 잠옷 바람으로 놀이터에 모여 앉아 밤을 지새웠고, 부산과 대구의 대형마트와 백화점에서는 고객들이 매장 밖으로 대피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통신사 서버는 안부를 확인하려는 전화와 문자로 마비되다시피 했다. 그런데 정작 사람들을 더 불안하게 만든 것은 따로 있었다. 정부의 긴급재난문자였다. 본진이 발생한 지 한참이 지나서야 재난문자가 도착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여론이 들끓기 시작했다. 실제 체감 진동으로부터 알림 문자가 오기까지 걸린 시간은 9분 안팎이었던 것으로 전해지는데, 지진이라는 재난의 특성상 그 몇 분이 뼈아픈 공백으로 느껴졌다. SNS에는 “지진이 다 끝나고 문자가 왔다”는 불만이 쏟아졌다. 이 지연은 이후 재난 문자 발송 체계를 근본적으로 재검토하게 만드는 계기가 됐지만, 그 밤에는 그저 무방비 상태의 국민들이 스스로 상황을 파악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불안은 곧 다른 곳으로 옮겨붙었다. 진앙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월성 원자력발전소가 자리하고 있었다. 지진 직후 한국수력원자력은 예방 차원에서 월성 원전의 일부 원자로 가동을 수동으로 정지시켰다. 방사능 유출 등 심각한 이상은 없었다고 발표됐지만, 국내 최대 원전 밀집 지역 중 한 곳이 규모 5.8 지진의 진앙과 지척에 있었다는 사실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공포를 안겼다. 그동안 원전 안전성 논의에서 지진은 늘 “확률이 낮은 변수”로 취급돼 왔다. 그 전제가 그날 밤 통째로 흔들린 셈이었다. 지질학자들 사이에서도 술렁임이 일었다. 경주 지진을 일으킨 단층은 양산단층대에 속한 것으로 추정됐는데, 이 단층대는 오래전부터 존재가 알려져 있었지만 실제 지진 활동성에 대해서는 학계에서도 의견이 엇갈려 왔다. “한반도는 지각판 경계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큰 지진이 드물다”는 통념이 있었지만, 이번 지진은 그 통념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사례였다. 더구나 본진 이후에도 지진은 멈추지 않았다. 크고 작은 여진이 하루에도 몇 차례씩 이어졌고, 그해 안에만 수백 차례의 여진이 관측된 것으로 알려졌다. 경주 시민들은 몇 주 동안 밤마다 다시 흔들릴지 모른다는 불안 속에 잠을 설쳐야 했다. 그런데 이 모든 소동이 가라앉을 무렵, 정말로 사람들이 두려워해야 했던 질문은 따로 있었다. “이 지진이 정말 수백 년, 수천 년에 한 번 있을 우연이었을까, 아니면 앞으로도 반복될 수 있다는 경고였을까.” 당시에는 이 질문에 자신 있게 답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정부와 학계는 “당분간 이 정도 규모의 지진이 다시 발생할 가능성은 낮다”는 취지의 설명을 내놓았고, 시간이 지나면서 여론의 관심도 점차 다른 이슈로 옮겨갔다. 경주는 서서히 일상을 되찾았고, 무너진 기와와 갈라진 담장은 하나둘 보수됐다. 하지만 그 답은 오래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정확히 1년여 뒤인 2017년 11월, 이번에는 포항에서 규모 5.4의 지진이 발생했다. 경주 지진보다 규모는 작았지만 진원의 깊이가 훨씬 얕았던 탓에 지표면에 전해진 충격은 더 컸고, 건물 붕괴와 대규모 이재민이 발생하는 실질적 피해로 이어졌다. 두 지진은 서로 다른 단층에서 발생했지만, 결과적으로 하나의 메시지를 남겼다. 한반도는 더 이상 지진의 안전지대가 아니라는 것, 그리고 경주 지진은 예외적인 해프닝이 아니라 이 땅 밑에서 실제로 에너지가 쌓이고 풀리고 있다는 증거였다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경주 지진이 남긴 것은 무너진 담장이나 깨진 기와가 아니었다. 그것은 오랫동안 당연하게 여겨온 안전 감각에 생긴 균열이었다. 이 지진 이후 정부는 건축물 내진 설계 기준을 강화했고, 기존 건물에 대한 내진 보강 논의가 본격화됐다. 재난문자 발송 체계도 손질됐다. 지진 보험이나 대피 요령에 무관심하던 사람들이 처음으로 집 안의 어느 위치가 그나마 안전한지 따져보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원전과 활성단층의 거리를 둘러싼 논의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공론화됐다. 첨성대는 신라시대 이래 크고 작은 지진을 여러 차례 견뎌내며 천 년 넘게 그 자리에 서 있었다. 2016년 9월의 그 밤에도 첨성대는 무너지지 않았다. 다만 아주 조금, 예전보다 더 기울었을 뿐이다. 어쩌면 그 미세한 기울기야말로 이 사건이 남긴 가장 정직한 증거일지도 모른다. 땅은 천 년이 지나도 완전히 멈춰 있지 않으며, 우리가 안전하다고 믿어온 땅 밑에서도 여전히 무언가는 조용히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