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6. 9. 4. AM 8:58:26 · 조회 3
2010년 3월 26일 밤 9시 22분, 서해 백령도 인근 바다를 순찰하던 해군 초계함 한 척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강한 충격이 발생했다. 배는 순식간에 두 동강이 났고, 함미 쪽은 그대로 바다 밑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캄캄한 밤바다, 영하에 가까운 수온, 그리고 아무런 예고도 없었던 순간이었다. 배에 타고 있던 승조원 100여 명 가운데 절반에 가까운 이들이 그날 이후 다시는 육지를 밟지 못했다. 무엇이 이 배를, 이렇게 순식간에 두 동강 낼 수 있었을까. 사고였을까, 공격이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두고 대한민국은 이후 몇 달간, 그리고 사실 지금까지도 완전히 하나로 합의하지 못했다. 사고를 당한 배는 해군 제2함대 소속 초계함 천안함이었다. 배수량 1200톤급으로, 서해 북방한계선(NLL) 인근 경계 임무를 수행하던 중이었다. 사고 해역은 백령도 서남쪽 해상으로, 남북 간 군사적 긴장이 상시적으로 존재하는 곳이었다. 사고 직후 해군은 초계함이 절반으로 절단된 채 침몰 중이라는 급박한 보고를 받았고, 인근 해군과 해경 함정, 민간 어선까지 동원한 구조 작전이 밤새 이어졌다. 함수 부분에 있던 승조원 상당수는 구조됐지만, 함미와 함께 가라앉은 이들의 생사는 오랫동안 확인되지 않았다. 사고 다음 날부터 정부와 군은 정확한 원인을 밝히기 위해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였다. 초기에는 기뢰 접촉, 좌초, 내부 폭발 등 여러 가능성이 언론을 통해 거론됐다. 국방부는 성급한 단정을 피하며 다국적 전문가와 함께 정밀 조사에 착수하겠다고 밝혔다. 그 사이 실종자 가족들은 백령도와 평택 2함대 사령부를 오가며 생사조차 알 수 없는 시간을 견뎌야 했다. 사고 발생 며칠 뒤 잠수 요원들이 침몰한 함미 부분에 접근해 시신을 수습하기 시작했지만, 거센 조류와 낮은 시야 때문에 작업은 극도로 더뎠다. 이 과정에서 수색 작업에 투입됐던 민간 어선 한 척이 다른 사고로 침몰해 선원들이 목숨을 잃는 안타까운 일도 있었고, 실종자 수색에 나섰던 해군 특수전 요원 한 명도 작업 도중 순직한 것으로 알려졌다. 배 안에 있던 이들이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과, 시간이 지날수록 옅어지는 그 가능성 사이에서 온 국민이 초조하게 뉴스를 지켜보던 시기였다. 함미가 인양된 것은 사고로부터 보름 남짓 지난 뒤였다. 절단면을 육안으로 확인한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곧바로 술렁임이 일었다. 절단면이 매끄럽지 않고 안쪽으로 심하게 휘어져 있었던 것이다. 이는 내부 폭발보다는 외부에서 가해진 강한 충격, 그것도 물기둥을 동반하는 비접촉 수중 폭발의 특징에 가깝다는 분석이 나왔다. 함체 상단부가 아래에서 위로 밀려 올라간 듯한 손상 형태 역시 그런 추정에 힘을 실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무엇이 폭발했는지, 누가 그것을 일으켰는지 알 수 없었다. 조사는 이제 막 시작이었다. 정부는 5월 초, 민간과 군, 그리고 미국·영국·호주·스웨덴 등 여러 나라 전문가가 참여한 합동조사단을 꾸려 그간의 조사 결과를 정리해 발표하겠다고 예고했다. 이 발표를 앞두고 여러 추측이 오갔다. 일부에서는 노후 기뢰의 우발적 폭발 가능성을, 일부에서는 좌초 후 파손 가능성을 제기했다. 야권 일각과 일부 과학자들은 정부의 조사 방식과 속도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며, 결론을 미리 정해두고 짜맞추는 것 아니냐는 의혹의 시선을 보내기도 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조사단이 서해 바닥에서 무언가를 끌어올렸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다름 아닌, 폭발한 무기의 잔해로 추정되는 금속 파편이었다. 그해 5월 20일, 합동조사단은 서울 용산 국방부 청사에서 그동안의 조사 결과를 공식 발표했다. 결론은 천안함이 북한이 제조한 것으로 추정되는 어뢰의 수중 폭발로 침몰했다는 것이었다. 조사단은 사고 해역 인근에서 인양한 어뢰 추진체 부품을 근거로 제시했다. 그 부품 안쪽에는 한글로 손글씨처럼 적힌 '1번'이라는 표기가 남아 있었는데, 조사단은 이것이 북한이 그간 수출한 어뢰 도면에서 확인되던 표기 방식과 일치한다고 설명했다. 여기에 폭발로 생긴 화약 성분 분석 결과와 지진파·음향 관측 자료, 함체 손상 형태에 대한 시뮬레이션 결과까지 종합해, 조사단은 북한 잠수정에서 발사된 어뢰가 함저 부근에서 폭발하며 배를 두 동강 냈다고 결론지었다. 이 발표는 순식간에 전 세계 뉴스의 머리기사가 됐다. 북한은 이 발표를 즉각 부인했다. 자신들과 무관한 일이며, 조사 결과 자체가 조작됐다는 주장을 내놓았다. 남북 관계는 그대로 급격히 얼어붙었다. 정부는 발표 나흘 뒤인 5월 24일, 개성공단을 제외한 남북 교역과 교류를 사실상 전면 중단하는 조치를 발표했다. 이른바 '5·24 조치'로 불리는 이 대북 제재는 이후 오랫동안 남북 경제협력의 상징적 단절선으로 남게 된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역시 이 사건을 두고 논의를 벌였지만, 중국과 러시아의 반대로 북한을 직접 가해자로 명시하지는 못한 채, 공격을 규탄하되 가해 주체는 특정하지 않는 절충된 의장성명을 채택하는 데 그쳤다. 국제사회조차 완전히 한목소리를 내지 못한 셈이었다. 그러나 정부의 공식 발표 이후에도 논쟁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국내 일부 과학자와 시민단체, 정치권 일각에서는 '1번' 표기의 잉크가 폭발 열에도 타지 않은 점, 어뢰 부품의 부식 상태가 오랜 기간 해저에 있었던 것치고는 지나치게 깨끗하다는 점 등을 들어 조사 결과에 의문을 제기했다. 이들은 좌초나 다른 원인에 의한 사고 가능성, 혹은 조사 과정의 신뢰성 자체를 문제 삼았다. 이에 대해 조사단과 정부는 각각의 의혹에 대해 추가 설명과 재검증 결과를 내놓으며 반박했지만, 이 논쟁은 완전히 해소되지 못한 채 이후 수년간 법정 공방과 정치적 논쟁으로 이어졌다. 천안함을 둘러싼 이 두 개의 시선 — 북한의 공격이 명백하다는 입장과, 공식 조사 결과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는 입장 — 은 지금까지도 완전히 좁혀지지 않은 채 남아 있다. 분명한 사실은, 그날 밤 서해 바다에서 실제로 마흔여섯 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진 젊은 해군 장병들이 목숨을 잃었다는 것이다. 이들 대부분은 이십 대 초중반의 나이였고, 훈련을 마치고 임무에 투입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이들도 있었다. 사고 이후 이들의 이름은 국립대전현충원에 나란히 새겨졌고, 유가족들은 매년 3월이면 그 앞에 모여 오래도록 자리를 지킨다. 사건의 원인을 둘러싼 논쟁이 아무리 뜨거워도, 그 논쟁이 이들의 죽음이라는 사실 자체를 흐릿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목소리가 시간이 지나며 오히려 더 커졌다. 천안함 사건은 이후 한국 사회에서 안보와 정치가 어떻게 뒤엉키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상징적 장면으로 자주 소환된다. 군은 이 사건을 계기로 서해 경계 태세와 대잠수함 탐지 체계를 대대적으로 점검했고, 남북 관계는 이 사건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냉각기를 겪었다. 해마다 3월 26일이 다가오면 언론은 다시 이 사건을 조명하고, 그때마다 못다 푼 의문들도 함께 소환된다. 다만 확실한 것은, 그날 백령도 앞바다에서 갑자기 두 동강 난 배 안에 있던 이들에게는 그 밤이 삶의 마지막 순간이었다는 사실이다. 진실을 둘러싼 논쟁이 언제 어떻게 완전히 정리될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지만, 그 바다 밑에 가라앉았던 배의 잔해처럼, 이 사건이 남긴 질문들 역시 쉽게 가라앉지 않은 채 여전히 수면 위에 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