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6. 9. 3. AM 7:46:04 · 조회 2
1997년 11월 21일 밤, 서울 명동의 한 환전소 앞에는 늦은 시간까지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원화를 조금이라도 더 나은 값에 달러로 바꾸려는 사람들이었다. 같은 시각 정부 청사에서는 강경식 경제부총리가 다음날 있을 대국민 발표를 앞두고 마지막 문구를 다듬고 있었다. 불과 며칠 전까지도 정부는 "우리 경제의 펀더멘털은 튼튼하다"고 공언해왔다. 그런데 이제 와서 국제통화기금,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한다는 발표를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무엇이 바뀐 것일까. 아니, 애초에 정부는 이 사태를 정말 예상하지 못했던 것일까. 그 답을 이해하려면 시계를 몇 달, 몇 년 더 앞으로 돌려야 한다. 1990년대 중반 한국 경제는 겉으로는 화려했다. 삼성, 현대, 대우 같은 대기업들은 문어발식으로 사업을 확장했고, 은행과 종합금융회사(종금사)들은 해외에서 단기로 돈을 빌려와 국내 기업에 장기로 빌려주는 방식으로 몸집을 불렸다. 짧게 빌려서 길게 굴리는 이 구조는 돈이 계속 잘 돌 때는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어느 한 곳에서 균열이 생기면 순식간에 전체가 흔들릴 수 있는 위태로운 구조이기도 했다. 균열은 1997년 초부터 시작됐다. 1월 재계 순위 14위였던 한보철강이 부도를 냈다. 정치권과의 유착 의혹까지 불거지며 파장이 컸다. 이어 삼미그룹, 진로그룹, 대농그룹이 잇따라 무너졌고, 7월에는 기아그룹까지 부도 위기에 몰렸다. 한 해 동안 굴지의 대기업 집단이 줄줄이 쓰러지는 광경을, 사람들은 낯설게 바라봤다. "설마 나라 전체가 흔들리기야 하겠느냐"는 생각이 여전히 지배적이었다. 그 사이 태평양 건너 동남아시아에서는 더 큰 파도가 일고 있었다. 1997년 7월 태국이 자국 통화인 바트화의 고정환율제를 포기하면서 바트화 가치가 폭락했고, 이 충격은 곧 필리핀,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로 번졌다. 외국 투자자들은 아시아 신흥국 전반에 대한 신뢰를 급격히 거두어들이기 시작했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었다. 한국 기업과 금융회사들이 짊어지고 있던 막대한 단기 외채가 이제는 언제 갚아야 할지 모르는 시한폭탄처럼 여겨지기 시작한 것이다. 10월로 접어들면서 외국계 금융회사들은 한국 종금사와 은행에 빌려준 단기 자금을 만기 연장 없이 회수하기 시작했다. 원화 가치는 떨어지고 외환보유고는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그런데도 정부의 공식 언어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환율 방어에 문제없다", "외환보유고는 충분하다"는 발표가 반복됐다. 시장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오히려 정부가 뭔가를 감추고 있는 것 아니냐는 의심이 퍼지기 시작했다. 11월에 들어서자 상황은 눈에 띄게 급박해졌다. 종합주가지수는 곤두박질쳤고, 원-달러 환율은 하루가 다르게 치솟았다. 외환당국은 보유 외환을 풀어 환율을 방어하려 했지만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11월 중순, 정부 내부에서는 이미 IMF행이 불가피하다는 의견이 힘을 얻고 있었다는 사실이 훗날 알려졌다. 하지만 공개적으로는 여전히 "자체적으로 해결 가능하다"는 메시지가 나갔다. 왜 정부는 끝까지 그렇게 말했을까 하는 물음은, 이후 오랫동안 이 사건을 둘러싼 가장 뼈아픈 질문으로 남게 된다. 11월 19일, 강경식 부총리가 경질되고 임창열 신임 부총리가 취임했다. 그리고 이틀 뒤인 11월 21일 밤, 정부는 마침내 IMF에 유동성 지원을 공식 요청하겠다고 발표했다. 다음 날 아침 신문 1면에는 "IMF 구제금융 요청"이라는 활자가 큼지막하게 박혔다. 많은 국민들에게 이 소식은 청천벽력과도 같았다. 불과 얼마 전까지 정부가 "문제없다"고 말해왔던 나라가, 하루아침에 국제기구에 손을 벌려야 하는 처지가 됐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다. 12월 3일, 한국 정부와 IMF는 구제금융 합의서에 서명했다. 지원 규모는 IMF 자금과 세계은행, 아시아개발은행, 그리고 미국을 비롯한 주요국의 양자 지원까지 합쳐 총 550억 달러 이상으로 알려졌으며, 이는 당시 기준으로 IMF 역사상 최대 규모의 구제금융 중 하나로 꼽혔다. 그 대가로 한국은 고금리 정책, 강도 높은 구조조정, 자본시장 개방 확대 등 IMF가 요구하는 여러 조건들을 받아들여야 했다. 12월 3일은 이후 "국가부도의 날"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오래도록 회자되는 날이 됐다. 그런데 이 사태의 전개를 뜯어보면 석연치 않은 대목이 하나 있다. 정부가 위기 내내 발표해온 외환보유고 수치와, 실제로 즉시 쓸 수 있었던 '가용' 외환보유고 사이에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발표된 총 외환보유고에는 시중은행에 이미 빌려주었거나 단기간에 회수하기 어려운 자금까지 포함되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다시 말해 겉으로 보이는 숫자와, 정작 급할 때 정부가 손에 쥐고 쓸 수 있는 돈 사이에는 상당한 간극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 사실이 이후 국정감사와 언론 보도를 통해 알려지면서, "정부가 사태의 심각성을 알고도 국민에게 제때 알리지 않은 것 아니냐"는 비판이 거세게 일었다. 실제로 위기가 코앞에 닥친 순간까지도 정부 고위 관계자들의 공개 발언은 낙관적인 어조를 유지하고 있었고, 이는 훗날 정부의 위기 대응 방식 전반에 대한 논란으로 이어졌다. 결국 많은 이들이 나중에서야 알게 된 진실은 이런 것이었다. 한국은 그해 가을 이미 사실상 외환위기 상태에 진입해 있었고, 정부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 실체를 온전히 드러내지 않은 채 시간을 벌어보려 했다는 것. 그 시간 벌기가 성공했다면 역사는 다르게 쓰였을지도 모르지만, 결과적으로는 협상의 주도권을 잃은 채 더 불리한 조건으로 IMF와 마주해야 했다는 평가가 많다. "펀더멘털은 튼튼하다"던 말과, 불과 며칠 뒤 국가부도 위기를 인정해야 했던 현실 사이의 간극. 그 간극이야말로 이 사건이 오래도록 국민들의 마음에 배신감처럼 남게 된 이유였다. 위기의 파장은 예상보다 훨씬 넓고 깊었다. IMF 처방에 따른 고금리 정책은 그렇지 않아도 어려운 기업들을 벼랑 끝으로 몰았고, 대기업과 은행의 구조조정이 전방위로 진행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직장을 잃었다. 1998년 실업률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이 치솟았고, 거리에는 노숙인이 눈에 띄게 늘었다는 보도가 이어졌다. 명예퇴직과 정리해고라는 말이 일상어처럼 쓰이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부터였다. 가정이 흔들리고, 중산층이라 믿었던 삶의 기반이 무너지는 경험을 한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 와중에도 국민들이 보여준 대응은 인상적이었다. 1998년 초 전국적으로 벌어진 '금 모으기 운동'에는 결혼반지, 아이 돌반지, 메달 같은 개인 소장 금붙이를 들고 나온 시민들의 행렬이 이어졌다고 전해진다. 이렇게 모인 금은 수출용으로 활용돼 외환 확보에 보탬이 됐다는 평가를 받았다. 물론 이 운동만으로 위기가 해소된 것은 아니었지만, 국가적 위기 앞에서 자발적으로 힘을 모으려 했던 당시의 분위기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으로 지금도 종종 언급된다. 정치적으로도 이 사태는 큰 파장을 남겼다. 1997년 12월 대통령 선거는 외환위기 한복판에서 치러졌고, 김대중 후보가 당선되며 헌정사상 최초의 여야 정권교체가 이뤄졌다. 새 정부는 출범 직후부터 IMF와의 이행 약속을 지키는 한편, 기업 구조조정과 금융개혁을 강도 높게 추진해야 하는 과제를 떠안았다. 이후 한국은 예정보다 이른 2001년 8월 IMF 차입금을 조기 상환하며 관리체제를 벗어났다고 알려져 있다. 흔히 이를 두고 "IMF 졸업"이라 부르며 위기 극복의 성과로 평가하는 시각이 있는 한편, 그 과정에서 노동시장 유연화가 가속화되고 비정규직이 급증하는 등 사회 구조 자체가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재편됐다는 지적도 함께 나온다. 지금도 1997년을 살았던 세대에게 그해 겨울은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다니던 회사가 하루아침에 사라지고, 안정적이라 믿었던 것들이 얼마나 쉽게 흔들릴 수 있는지를 목격한 시간이었다. 동시에 그것은 화려해 보이던 성장의 이면에, 얼마나 위태로운 구조와 감춰진 숫자들이 자리하고 있었는지를 뒤늦게 깨닫게 된 시간이기도 했다. 그날 정부가 좀 더 일찍, 좀 더 솔직하게 위기를 알렸더라면 무엇이 달라졌을까.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지금도 명확히 내려지지 않은 채, 매해 11월이면 한 번씩 다시 소환되는 물음으로 남아 있다.